왜 그룬트비의 노래는 오늘날에도 통하는가?

원문 : Why Grundtvig’s songs make sense today


Uldum 폴케호이스콜레의 선생님이자 피아니스트인 Jacob Tybjerg는 폴케호이스콜레의 10가지 레슨 시리즈의 제5권인 “함께 노래하기 (Sing together)“에 나온 이 이야기에서 왜 그룬트비의 노래는 오늘날에도 통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학생이 강당에 앉아있다. 다들 폴케호이스콜레 노래집(Songbook)을 손에 쥐고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듣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할 준비를 마쳤다. 이제 폴케호이스콜레 노래집에 있는 첫 번째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 노래는 그룬트비의 “축복의 날(The blessed day)”이다. 어떤 학생에게는 이 노래가 그룬트비와의 첫 만남일 것이다. 그의 흔적과 마주한 적이 있지만 몰랐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 폴케호이스콜레에 왔고 좋든 싫든 그룬트비의 시적인 세계에 빠질 것이다. 노래집의 현재 출판본에 있는 작곡가 중 그룬트비의 노래가 가장 많이 실려있고 신념, 정신, 삶과 같은 여러 부문에서 대표곡으로 나와 있다. 즉, 그를 마주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저녁 시간의 강사는 “축복의 날(The blessed day)”을 부르기로 했다. 그는 이 노래집에서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 때문에 말이다.

(Let’s travel then to our fatherland

which never knows idle days.

There stands a castle so fine and grand

its halls all golden and gay,

where happy forever with friends we’ll talk

in eternity’s gentle rays.)


게으른 날들은 없는

우리의 조국을 여행하자

거기엔 멋지고 웅장한 성이 있지

영겁의 부드러운 빛살 속에서

친구들 대화하며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황금의 화려한 복도가 있지

그에게, 이 부분은 기쁨 속에서 그리고 모든 영원함을 위해, 우리 인간이 친구들과 따스함 속에서 쉴 수 있고 특히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그룬트비의 소망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삶에서 진실하고 중요한 것은 영생을 할 수 있을 때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죽을 때 마주할 수 있다. 삶은 매 순간 중요하다. 저녁 시간의 강의 주제는 대화와 소통이다.


유틀란트 반도의 신도석에서 (On a pew in West Jutland)


나는 가족과 신도석에 앉아있다. 여긴 장례식장이다. 늦은 여름이라 날씨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막 수확물을 집으로 거둬들인 시기다. 우리 모두 그렇겠지만 땅에 묻힐 사람을 위해 그룬트비의 찬송가 “숲은 이 땅에서 사라져간다(The forests fade across the land)”를 부르자. 이 찬송가는 그룬트비의 삶과 신념 그리고 근로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죽은 친구를 기억하기에 적합하다. 아마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을 기릴 수 있지만, 노랫말은 교회에 모인 우리가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찬송가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을 취하고(그것이 한 단어이든. 한 줄이든, 한 절이든) 우리의 세계로 가져와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한다. “숲은 이 땅에서 사라져간다”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찬송가이자 추수와 가을 그리고 삶이 가져다주는 변화에 관한 노래이다.


(Our thanks to him in song we show

for all His grace and giving,

for all he made in fields to grow,

for gifts of speech and living.

All through the year his peace he brings,

his light on us he showers,

and after winter comes the spring

with summer’s fruits and flowers.)

주님의 은혜와 베풂

주님이 불어넣으신 숨결

언어와 삶이란 선물에

이 노래에 감사함을 표한다네

주님이 찾아주신 평화

주님의 내려주신 은총

겨울이 지나면 여름의 과실과 꽃을 담을

봄이 찾아온다네

그룬트비 시의 다재다능함 (The multi-layered strength of Grundtvig’s poetry)


내가 일하는 폴케호이스콜레에서 학생들에게 왜 그룬트비의 노래와 찬송가를 불러야 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이 그룬트비를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노래는 다양한 방면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어서라고 대답했다. 특히 노래와 찬송가의 경계는 항상 모호했다. 또 “신과 관련된 부분”은 원한다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와 찬송가는 주로 빛과 즐거움 그리고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을 키우는 것과 같이 삶의 크고 중요한 것들에 관한 것이기에 시대를 관통할 수 있다.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그룬트비의 글은 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생각을 되새기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많은 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끝까지 읽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그룬트비는 우리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쉬운 주제 또한 많이 다루었다. 예를 들자면, ‘사랑을 다루는 법’과 같은 것이 있겠다.


(It is to see and be

each other as we are,

it is to share and bear

each other as we are,

it is so mouths and lips

on waking or in sleep

still in a kiss can meet!)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있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나누고 견디기 위함입니다.

꿈에서라도 입을 맞출 수 있어서 좋습니다.

역사와 시 (History and poetry)


역사와 시는 그룬트비의 글에서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룬트비는 노래집의 역사 부문 또한 대표하고 있다. 시의 목소리는 인간이 가진 꿈에 관해 얘기하고 역사의 목소리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들려준다. 신화와 시 그리고 문학을 통해 사람들이 그룬트비가 “삶의 수수께끼라”라고 부르는 것을 풀기 위해 애썼던 과정을 엿들을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화는 세상을 구성한다. 그리고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신화를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세상이 어떠한지 그리고 어떠하였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배워야 한다. 그룬트비는 노래를 통해 신화를 비중 있게 다루었지만, 반드시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표현하진 않았다. 그룬트비는 자신의 시에서 지혜는 신화의 이면에 숨겨져 있다고 표현했다.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현재의 관점에서 비추어 볼 수도 있고 타인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하는 미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신화는 노래와 이야기 속에 있고 그룬트비에게 신화의 언어는 시의 언어였다. 즉 그룬트비의 노래와 찬송가는 무겁고 독단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다. 빛과 포용의 서술이다.

(I wandered out one summer’s day to hearken,

birdsong moved my heart to lift and quicken.

In deep-sided valleys

nightingale song carries

and the other birds with their small sallies.)

어느 여름날, 길을 거닐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깊은 계곡 속에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부르며

다른 새들이 지저귄다.

왜 그룬트비의 노래를 부를까? (Why sing Grundtvig’s songs?)


가끔 한 단어나 문장을 노래의 맥락에서 떼어놓고 들여다보는 것도 재밌을 수 있다. 그룬트비의 찬송가 “이스터 꽃 (Easter flower)”에서, 그는 3절의 “이스터 꽃! 하지만 정말로 우리는 목적과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우리가 가끔 스스로 물어보는 질문일 것이다. 많은 질문이 있는 3절은 정말 훌륭하다. 많은 의구심을 표하고 있고 그룬트비는 이를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정원에 있는 소작농의 꽃”처럼 표현하였다.


나에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하는 것은 가깝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신호이다. 타인과 의구심을 공유할 때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 우리는 타인의 답변과 물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신뢰와 존중을 보이며, 인생의 굴곡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의 삶을 드나들어야 한다. 다음 절에서 수선화가 답을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서로 가진 상호 의존성의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Easter flower! Is it true?

Have we purpose or a reason?

Are our sermins just cuckoo?

Can the dead escape death’s region?

Did He rise, as it was said?

Will His words, or are they dead?

From daffodils in gold array

will life spring forth on Easter Day?

If the dead cannot take flight,

meaning has for us no place,

we must wither out of sight,

gardens never shall we grace;

deep, forgotten under loam

never wondrous beauty grown,

melted in the darkest cave

and as candles light the grave.)

이스터 꽃! 정말이야?

우리가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게?

우리의 믿음은 미친 것일까?

죽은 이가 죽음의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어?

소문대로, 그가 일어났어?

그의 말대로 될까? 아니면 그들은 죽었어?

황금빛 열을 이루고 있는 수선화로부터

부활절에 생명이 탄생할까요?

죽은 이가 달아날 수 없다면

우리에겐 자리가 없다는 뜻이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들어야 해

우리는 정원을 빛내지 못하고

양토 아래 깊은 곳에서 잊히고

멋진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하고

무덤 속의 양초가 그러하듯

가장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사라질 거야

그룬트비의 강점은 엄청난 양의 글을 썼다는 점이다. 모든 입맛에도, 어떠한 상황에도 적절할 수 있는 글이 있다. 학교가 변화할 때, 편안함이 필요할 때, 삶에 고운 그늘이 필요할 때에도 말이다. 그룬트비의 노래와 찬송가를 부를 때면,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과 메시지에 친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역사적인 시대나 다른 세기 및 열렬한 사랑 이야기, 정치, 윤리, 종교, 도덕적 회고 그리고 학교와 교육의 관점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룬트비의 방대한 시적인 작품들로 우리의 시야와 관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정제시킬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을 늘릴 수 있다. 그룬트비는 모든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시인이고 이 때문에 그룬트비는 정말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다.


신화 (The myth)


니콜라이 프레데리크 세베린 그룬트비는 그 자체로 신화적인 존재일 것이다. 신화는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고 어떤 이들은 신화를 거짓을 표할 기회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룬트비 신화는 삶을 살아가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그룬트비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가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화이다. 다시 말해, 그룬트비의 찬송가와 노래는 우리가 원한다면 의지할 수 있는 방대한 지혜를 담고 있다. 이는 강의나 장례식 또는 행사의 시작으로써 사용될 수도 있다. 그룬트비는 영원히 의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화적’이길 꿈꾼다. 여기서 ‘신화적’은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얘기하고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일생에 만난 많은 선생님을 신화적으로 여긴다. 그들은 나를 위해 엄청난 것들을 해주었고 그 방식이 너무 특별했기에 나에겐 신화적이다. 그룬트비는 신화를 써냈고 그것을 읽을 사람과 부를 사람들이 스스로 그룬트비의 신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받아드렸다. 즉 새로운 지혜가 생겨난 것이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그룬트비의 노래와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면, 이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룬트비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선택지들을 주었다. 우리는 목적과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그룬트비 작품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는 우리가 한 번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이 또한 하나의 생각일 수 있다. 그룬트비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주기적으로 그의 관점과 태도를 바꾸었다. 이것이 정답이다. 우리가 움직일 때, 주위는 변한다. 그룬트비는 우리는 삶에 대한 헌신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고 일상생활을 초월하는 깊은 열망을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우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A life on earth that’s joyful, active, plain,

I would not trade for any royal throne,

to walk aware of paths our fathers came –

with shared respect for high and humble homes,

with eyes, as they were made, turned to the skies,

alert to beauty’s bounty here below,

but knowing, too, where deeper longings lie,

fulfilled alone by heavens eternal glow.)

이 땅에서 즐겁고, 활발하며 솔직한 삶

나는 그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오신 길을 알며 걷기 위해

높고 변변찮은 집을 위한 서로의 존중과

여기 아래의 충만한 아름다움을 알며

하늘을 향한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천국의 영원한 빛에 의해 채워진

깊은 열망이 놓인 곳 또한 알며

Jacob Tybjerg

Uldum 폴케호이스콜레에 교사이자 피아니스트. 교육학, 연극, 디지털 인식을 가르치는 교사이며 학생 상담사 입니다. Uldum에서 자유학교 교사를 위한 Independent Academy을 졸업.

Uldum 폴케호이스콜레(Uldum Popic High School)는 다양한 과목을 제공하는 폴케호이스콜레이다. 1849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폴케호이스콜레 중 하나이다.

폴케호이스콜레로부터의 10개의 교훈(10 Lessons from the Folk High School)은 2019년 기념된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 운동의 175주년 기념일에 출판된 11권의 단편입니다. 각각의 다음권들은 폴케호이스콜레의 하나의 특성을 폴케호이스콜레의 유래, 과거, 미래, 덴마크와 전 세계와 관련성을 검토하고 오늘날의 폴케호이스콜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여줍니다.